- 작가 소개
할란 엘리슨(1934~2018)
중단편 만으로 휴고상, 에드거상, 네뷸러상 등 유수의 각종 문학상을 60여 차례나 수상한 미친 천재!
...라고 하네요.
SF의 방식으로 인간 내면세계를 구현하는 '뉴웨이브' 장르의 거장이라고 함.
하지만 이 책만 봐도 알겠지만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작품군을 씀.
- 책 소개
이번 책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친 짐승', '제프티는 다섯 살' 과 더불어 할란 엘리슨의 단편집(전3권) 중 하나인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 임.
- 전체적인 감상
단편들의 설정 하나하나가 신박하고 흥미로움. 그래서인지 난해하거나 기괴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음.
문장 가독성이 좀 떨어진단 평이 있긴 하고 나도 안 느낀건 아닌데 그렇게까지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음. 정리하자면 그냥 글마다 다름.
줄거리는 내가 쓴거라 틀린 부분이 있을 수도 있음...
- 줄거리와 후기
1. 마노로 깎은 메피스토(1993)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심상 유람' 능력자 루디 패리스는 어느 날 가장 신뢰하는 친구이자 유능한 지방검사 차장인 앨리슨 로슈에게 부탁을 받는다. 그 부탁이란, 다름아닌 40명이 넘는 사람을 잔인하게 살해하여 사형수로 복역 중인 '헨리 레이크 스패닝' 의 마음 속에 들어가 달라는 것. 그리고 이어지는 뜻밖의 고백. 앨리슨은 헨리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가 결백하다고 믿고 있었다. 루디는 심히 당황하지만 앨리슨의 간절한 부탁에 따라 앨리슨의 심상에 들어가 보고는, 헨리를 향한 앨리슨의 마음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헨리를 만나기 위해 그가 있는 홀먼 교도소로 향하는데...
뒤로 갈수록 반전이 돋보이는 작품임... 생각보다 오락성이 짙은 글이라고 생각함. 텔레파시 능력이라는 흔한 설정을, 자칫 싫증나거나 뻔하게 느껴질 수 있는 소재를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음.
또 루디와 앨리슨, 헨리의 관계 또한 주목할 만한 부분. 어쩌면 가장 중점적으로 봐야 할 요소가 아닐까 싶음. 루디와 앨리슨의 복잡미묘한 관계가 사건의 도화선이 된 만큼...
앨리슨을 향한 애정, 그리고 그의 부탁을 향한 갈등을 느끼는 루디의 심경 묘사를 읽고 있자면, 독자로 하여금 루디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는 심상 유람 능력자로 만드는 것 같은 기분임.
앨리슨의 눈이 돌을 바라보았다. 돌로 만들어진 남자를. 나를. 그리고 내가 무심코 할 수 있는 일을 하게끔 부추겼다.
...(중략)
나는 그것이 우리 우정의 종말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앨리슨은 나에게 도망칠 구석을 남겨주지 않았다. 마노로 깎은 메피스토여. 그래서 나는 앨리슨의 심상에 뛰어들었다.
2.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1967)
냉전 이후 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인류는 전쟁에 사용할 컴퓨터 AM(Allied Mastercomputer)을 만든다. 하지만 AM은 어느 날 지성을 갖게 되고, 살인에 대한 데이터를 총 동원해 전 인류를 몰살시킨다. 딱 다섯 명만 제외하고 말이다. AM은 장장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인류를 향한 증오를 쏟아내듯이 다섯 명을 고문한다. 그들을 강제로 영생하게 만들며 영원히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AM, 다양한 신체적/정신적 개조를 가해 그들을 절망 속에 몰아넣고, 환각과 악몽, 재난으로 상처 입히고 치유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어느 날, 몇 달을 굶은 다섯 명은 통조림을 찾기 위해 위험한 여정을 떠나도록 강요받는데...
유명한 작품임. SF지만 상당히 읽기 쉽게 되어 있어서 한번 읽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음.
일단 스토리가 기괴한데 기괴한 스토리를 이렇게 푸는 것도 재능이 아니면 불가할 것 같음.
디스토피아 중에서도 손꼽히는 비극적인 미래를 다루고 있고 기계지만 신의 위치에 범접한 AM의 모습을 통해 코즈믹 호러를 느낄 수 있음. 그래서인지 마치 신화를 보는 느낌이 들었음. 신이라고 한다면 쪼잔한 신이겠지만... 신화에서도 신들은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생각하고 행동하니까...
유일하게 개조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화자, 테드도 혹자는 개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함.
글 자체가 테드 시점인지라 확실하진 않지만 내 생각으로는 테드가 어떤 상황에서도 정신이 붕괴되지 않는, 강인한 정신을 가지도록 개조를 당한 것이 아닌가 싶음. 묘사 상 다른 사람들에 비해 지나치게 이성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음.
정신이 또렷하다는 건 이 세계에선 오히려 고통으로 다가올 테니, AM이 그런 의도를 가졌다면 납득이 가는 부분임.
여담으로 95년에 이 작품 원작으로 한 게임이 나왔는데 작가인 할란 엘리슨이 AM 목소리 맡았다함(ㅋㅋㅋ) 게임에 대해서 궁금하면 아래 참고(영어임). 이 게임은 스팀에 있음!
아, 예수님 다정하신 예수님, 예수님이 정말 있다면, 하느님이 정말 있다면 제발 제발 제발 우리가 여기에서 나가게 해주시거나 우릴 죽여주세요. 그 순간 나는 완벽하게 깨달았던 것 같다. 이제는 내 입으로 말할 수 있었다. AM은 우리를 영원히 자기 배 속에 넣어두고 영원히 괴롭히고 고문할 생각이라는 걸. 그 기계는 어떤 지성체에게도 가능하지 않았던 수준으로 우리를 증오했다. 그리고 우리는 무력했다. 그리고 끔찍하게도 이것 또한 명확해졌다.
만약 다정하신 예수님이 있고 하느님이 있다면, 그 하느님은 AM이었다.
3. 크로아토안(1975)
게이브는 여러 여자들과 잠자리를 같이 했던 문란한 사내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피임을 하라는 권유를 계속해서 무시하며, 태어난 아이를 비닐봉지에 담아 변기에 흘려보내는 행위를 몇 번이나 반복한다.
그 모습을 목격한 캐롤. 게이브와 현재 함께 사는 여자인 그는 오열하며 게이브에게 자신의 아이를 찾아오라 한다. 결국 하수도로 내려가는 게이브, 그가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벽면에 새겨진 'CROATOAN' 이라는 글자. 그곳은 또 다른 도시였다. 아니, 도시라기 보다는 지옥이었다. 게이브는 자신을 향해 아버지라 부르는 수많은 아이들을 본다.
※ 로어노크 섬은 16세기에 월터 롤리 경이 발견한 섬이자 영국이 개척하려 했던 식민지이다. 존 화이트가 식민지 주재사로 있었다. 보고와 보급을 위해 영국에 돌아갔던 그가 3년 뒤 섬에 귀환했을 때 100명이 넘는 식민지인들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크로아토안'이라는 문구만 남겨져 있어 "잃어버린 식민지(The Lost Colony at Roanoke)"라고 불린다.
줄거리라고 하면 위에 쓴 저게 전부임. 크로아토안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는 나와 있지 않아 상상력을 자극함. 그곳의 생명체들은 특이한 방식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다고 게이브가 언급함.
게이브는 자의든 타의든 그곳에 머물러 있는 모양인데, 크로아토안이 현실세계인지, 사후세계인지도 독자의 해석에 따라 나뉠 수 있다고 봄.
사후세계라고 한다면, 게이브를 기다려 왔다는 아이들의 말처럼 그곳은 게이브를 위한 지옥이 아니었을까?
덧붙여 영국의 식민지 주지사 존 화이트도 언젠가는 게이브처럼, 식민지 원주민들이 기다리는 지옥에 도착하지 않았을까. 작가가 그린 크로아토안은 그런 곳이니까...
내가 드니스와 조애나에게 전화해서 캐롤이 임신했다고 말했을 때, 둘은 한숨을 쉬었다.
...(중략)
조애나가 으르렁거렸다. "이 아무 생각도 없는 좆의 숙주야!" 그러고는 연결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로부터 20분 동안 드니스가 나를 책망했다. 드니스는 정관수술을 권하지 않았다. 대신에 박제사에게 의뢰해 치즈 강판으로 내 성기를 제거하는 방안을 제시하며 그 과정을 그림처럼 세세하게 묘사했다. 물론 마취는 없을 예정이었다.
4. 랑게르한스섬 표류기: 북위 38° 54' 서경 77° 00' 13"에서(1974)
영화 울프맨(The Wolfman, 1941)의 주인공 로렌스 탈봇은 늑대인간에게 물린 후 자신도 점점 야성에 잠식되고, 결국엔 보름달이 뜰 때마다 늑대인간으로 변하고 만다(울프맨 스토리). 괴로워하던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과학자인 빅터의 도움을 받기로 한다. 빅터는 탈봇에게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을 설명해 준다. 빅터의 제안을 받아들인 탈봇. 빅터는 아주 작은 크기의 탈봇을 하나 더 복제하고, 복제된 탈봇은 자신의 몸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내면 세계를 안정화시키기 위한 여행을 시작한다.
랑게르한스 섬(islets of Langerhans, pancreatic islets), 또는 이자 섬은 이자에 있는 내분비 조직이다. 1869년 해부병리학자 파울 랑게르한스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자 섬은 이자 부피의 1~2%를 차지하며 이자에 들어오는 10~15%의 혈류가 통과한다.
울프맨이라는 영화의 팬픽... 이라고 말하니까 뭔가 없어보이지만, 아무튼 그런 단편인 것 같음.
영화는 나도 듣도보도 못했는데 그냥 전형적인 늑대인간 영화라고만 생각해도 읽는 데는 문제 없다고 봄. 아마도...
정말 읽기 힘들었던 글이 아닌가... 싶음. 앞에서 설명했던 뉴웨이브 장르의 정수 같은 작품이라고 보면 되는데 처음 보는 장르라 그런지 좀 당황스러웠음. 근데 그거 아니더라도 가독성이 좀 으악스러움.
그래도 대충 이런 느낌이구나 하는 건 있음. 문학알못 갓반인인 내 감상으로는 "인체에서 살아남기 철학편" ...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서 소중한 물건들과 실체화된 기억들을 되짚는 장면은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생각나게 함.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난 모비딕은 자신이 해초 침대 속에서 괴물 같은 에이허브로 변해버린 것을 알았다.
우리는 탐험을 멈추지 않으리
그리고 우리의 모든 탐험의 끝은
우리가 시작한 곳에 도착해
처음으로 그곳을 알게 될 때이리라
─ T. S. 엘리엇
5. 폭신한 원숭이 인형(1987)
메디슨 가에서 노숙 생활을 하는 늙은 흑인 여성 애니. 우연한 계기로 마피아의 살인 현장을 목격한 뒤로 그들에게 추적당하게 된다. 애니가 추적당한 뒤로 계속해서 살해당하는 메디슨 가의 흑인 여성들. 하지만 애니는 죽을 수 없다. 죽어서는 안 된다. 항상 안고 있는 아기 인형을 향해 그는 말한다. 괜찮아, 아가야. 괜찮아. 우리는 안전해.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해.
비교행동학을 전문으로 하는 심리학자라면 푹신한 원숭이 실험을 알 것이다. 새끼를 잃은 어미 오랑우탄에게 푹신한 장난감 인형을 주면 마치 살아 있는 자기 새끼인 양 양육한다. 양육하고, 보호하고, 그 대용물을 위협하는 생물을 공격한다. 어미에게 철사로 만든 인형이나 도자기 인형을 주면 무시한다. 어미에겐 꼭 푹신한 원숭이여야만 한다. 그것이 어미를 지탱한다.
삶의 원동력을 작은 인형 하나에서 얻고 있는 애니라는 인물이 나옴.
늙은, 흑인, 그리고 노숙자, 여성. 약자 타이틀은 다 가지고 있는 애니가 마피아들과 싸울 수 있게 만드는 것도 그 인형에서 모성애를 느꼈기 때문으로 보임.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모성애는 위대하지만 정작 애니는 과거 아이를 잃었기에 인형을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보임.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음.
글의 묘사로 보면 애니는 진짜 아이가 아닌 인형인 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아이를 대하듯 인형을 다룸. 심리학은 잘 모르지만 원숭이들이 실제로 보이는 행동이라고 하니 신기할 따름임.
실험 설명 글귀에서 '어미를 지탱한다' 는 표현이 인상 깊었음. 어미가 그것을 보호하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어미도 살아 있을 수가 있었던 것이었음.
아이를 덮친 사고 차량을 아이의 어머니가 맨손으로 들어 올렸다는 얘기가 종종 들린다.
6. 꿈수면의 기능(1988)
로니 맥그레스는 주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경험을 겪고 난 뒤, 옆구리에서 '타나토스의 입' 이 열리는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괴로워한다. 그는 전처인 트리샤의 추천으로 애나 피킷이 주관하는 '렘 그룹' 에 참여한다. 하지만 그저 평범한 치료 모임인 줄 알았던 렘 그룹의 실체는 맥그레스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모습이었는데...
타나토스(영어: Thanatos, 그리스어: θάνατος – "죽음"이란 뜻)는 그리스 신화에서 죽음이 의인화된 신으로 자주 언급은 되지만, 인격신(人格神)으로 등장하는 일은 거의 없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에 대한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글이었음.
꿈수면이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렘(REM) 수면을 말한다고 함. 이 글에서 꿈수면의 기능에 대한 생각은 등장인물마다 다른 것을 알 수 있음. 애나는 꿈수면이 '기억 강화' 의 기능을 한다고 말하는데, 맥그레스는 반대로 꿈수면이 쓸모 없는 기억들을 '잊기 위한' 기능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음.
이 글에서 꿈수면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음. 꿈수면이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수단은 아니다, 나는 딱 여기까지만 받아들였던 것 같음.
타나토스는 인격체보다도 죽음 그 자체를 비유적인 의미로 나타낼 때 자주 쓰인다고 하는데, 이를 보면 맥그레스는 죽은 사람들을 모두 떠안고 있으며, 그것 때문에 힘겨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나는 타인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 그 자체가 죽음을 불러온다고 해석했음. 그건 다른 사람들이 떠안을 수 있는 무게도 아니었고 맥그레스가 정면으로 감당할 수 있지도 않았어서...
힐링글이라고 하기엔 좀 애매하지만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함.
꿈을 꾸었다. 미소 짓는 얼굴들이 나오는 꿈. 그리고 예전에 알던 아이들이 나오는 꿈. 다정한 꿈, 그를 안은 손들의 꿈.
...(중략)
그리고 그가 깼을 때는 세상이 아주 오랜만에 조금 서늘해졌다. 그리고 그들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 그는 마침내 안녕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7. 콜럼버스를 뭍에 데려다준 남자(1991)
이야기는 레벤디스의 서술로 이루어진다. 그의 서술에 따르면 레벤디스는 선행과 악행을 번갈아가면서 하는 기행을 벌이고 있다. 뺑소니에 의해 사망한 두 여자아이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냈지만, 그 전날 그는 고양이를 발로 차서 죽게 만들었다. 스킨헤드에게 폭행당하는 커플을 그냥 지켜보기만 하던 어떤 날과 달리, 그 다음날 그는 같은 상황에 처한 커플을 구해 준다.
일각에서는 레벤디스를 신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말함. 레벤디스가 하는 행동이 인간의 범주에서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임.
셜리 잭슨의 단편소설 '땅콩과 보내는 평범한 하루(One Ordinary Day, with Peanuts)' 가 작중 언급되는데, 내용을 찾아보면 선행과 악행의 균형을 맞추고자 부인이 선행을 하면 남편이 악행을 하고, 부인이 악행을 하면 남편이 선행을 하는 부부가 등장함.
왜 이런 정신 나간 짓을 하는지는 두 글에서 모두 안 나와 있음...
정말 신을 표현하려 했다고밖에 설명이 안 된다고 생각함.
여담으로 이 글에서 제주도가 언급돼서 신기했음...
이상의 이야기 제목은 '보답 없는 일에 몰두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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