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책

[리뷰/책] 변신

땅일단 2023. 5. 20. 20:54

저자 : 프란츠 카프카

읽은 날짜 : 2019.07.17

 

이 책은 고등학생 때 국어 선생님께 전체적인 줄거리와 함께 소개받은 적이 있었다. 줄거리는 간단한 편이었는데 글의 분위기나 상황이 상당히 암울해서 만약 결말을 알지 못했다면 책을 읽는 내내 계속 반전이 있겠지, 주인공에게도 좋은 날이 오겠지 하며 기다렸을 지도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큰 벌레의 모습으로 변한 외판원 그레고르, 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있는 청년이었다. 그는 자신이 아직까지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되새기려 노력한다. 하지만 계속되는 가족들의 외면과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 대한 절망 속에 그는 작품의 마지막에서 결국 벌레의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이번엔 그레고르의 가족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의 아버지는 결코 벌레의 모습으로 변한 그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사과를 집어던져 중상을 입히기도 한다. 어머니와 여동생 또한 처음에는 동정심을 느끼다 날이 갈수록 지쳐 갔고, 자신들의 행복을 갉아먹는다는 생각에 그레고르를, 아니 벌레를 없애버려야 한다는 결론에까지 이르게 된다. 결국 그가 식음을 전폐한 끝에 사망하자, 가족들은 걱정거리에서 벗어났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나들이를 떠나며, 새로운 시작을 꿈꾼다.

이 작품을 더욱 슬프게 만드는 부분은 벌레가 된 그레고르가 자신의 상황보다 자신이 일을 하지 못함으로써 생계가 힘들어지게 될 가족들을 더욱 걱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족들은 벌레가 된 그레고르를 방 안으로 밀어 넣으며 자신들의 가족으로 생각하지도 않는 모습을 보인다. 아무도 그레고르가 왜 벌레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 않으며, 작품 내에서 이유가 언급되지도 않는다. 생계를 책임지던 그레고르 대신 가족들은 자기 스스로 돈을 벌 길을 찾아 나서며, 그랬기에 굳이 그레고르가 다시 인간이 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는 죽은 그레고르의 시체까지도 가족이 아닌 가정부의 손으로 내다 버려졌다.

이 작품이 탄생되었던 1910년대는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때로, 고도의 산업화 사회의 뒷면에 노동자에 대한 가혹한 취급을 일삼는 자본가들의 폐해가 잇따르는 때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작품 초반에서 사장의 호통과 집까지 찾아온 지배인에 대해 많은 부담감을 느끼는 그레고르의 심정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가 심화될수록 가족들과의 유대 또한 예전처럼 강하지는 않은 양상을 보일 수밖에 없었는데, 결국 노동자는 안팎으로 압박을 받아야 했다. 생활력을 상실한 그레고르를 가족들이 부정한 것처럼, 노동자 또한 그런 부담감에 살고 있지는 않았을까?

이 작품과 관련된 다른 책을 찾아보던 중 이 책을 패러디한 로렌스 데이비드의 동화책 <Beetle Boy>를 알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아주 정반대의 결말을 보여준다. 주인공 그레고리가 딱정벌레의 모습으로 변한 것은 원작과 별로 다르지 않지만, 벌레가 된 그레고리를 본 아버지는 그를 껴안아 주며 말한다. “네가 어떻게 변해도 우리는 늘 너를 사랑한단다.” 그의 어머니도 덧붙인다. “사람이건 벌레건 말이야.” 그리고 다음 날 그레고리는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다.

이처럼 원작에서도 가족들이 그레고르가 왜 벌레가 되었는지에 대해 알려고 노력했다면, 또는 자신들을 위해 헌신하였던 그레고르의 노력을 인정하고 그에게 짊어지게 한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려 했다면 그는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지 않았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가족 부양에 대한 지나친 부담감과 가족들과의 단절이 그레고르를 벌레의 모습으로 만든 것은 아닐까 생각하였다.

오늘 본 뉴스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정신장애아들을 코피노(필리핀과 한국인 혼혈아)’로 속여 필리핀에 버린 부부 기소> 이 기사를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비정하다”, “저러고도 부모라 할 수 있나라는 식의 비난을 쏟아낸다. 하지만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자본주의의 핵심인 생활력을 잃어버린 자식을 자식 취급 하지 않고,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레고르의 가족처럼 말이다. 자식을 머나먼 나라에 내팽개친 비정한 부부를 변호할 생각은 아니지만, 만약 가족 중에 그레고르 같은 애물단지 하나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게 된다면 우린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할 것이다. ‘차라리 없는 게 낫지 않았을까?’

현재 사회에서 유산 상속 문제나 그 밖의 재산 다툼에 이런저런 폭력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자주 보이듯이,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분열되는 일은 생각보다 아주 빈번하다.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어떤 상황에서도 맹목적으로 애정과 사랑을 주는 이상적인 공동체라고 보면 곤란하다. 아무리 끈끈한 가족이라도 깨질 수 있는 상황은 충분히 만들어질 수 있고, 작가는 이를 극단적인 예시를 통해 지적하였다.

그레고르는 자신의 가족들이 자신이 죽길 원하는 것보다 더욱 죽길 바랐다. 여동생의 바이올린 소리를 듣고 감동하며 자신의 인간성을 찾으려 노력하지만 결국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주는 일 따위 없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서 생활력의 부재란 그 사람에게도 살아갈 의지를 잃게 하는 것이다. 무거운 책임감을 하루하루 짊어지고 살아갔던 가엾은 노동자 그레고르는 결국 죽음으로써 자유를 찾게 되었다.

여러모로 꿈도 희망도 없는 결말이고 충격적인 내용이었지만, 그만큼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을 잘 꼬집은 소설이 아니었나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