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개
미스터리 / 스릴러 장르만을 오랜 기간 집필한 서미애 작가의 데뷔 30주년 기념 단편집.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여성 중심의 서사를 다룬 단편이 많다.
이 단편집을 구매한 계기는 단순하다.
내가 이 분 미스터리 소설 작문법 강의를 들었는데 정작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잘 자요 엄마, 여우누이 다경, 당신의 별이 사라지던 밤 등,
여러가지 작품이 있었지만 하나의 장편보다는 다양한 작품을 보고 싶어서 단편집으로 택했다.
그러나 다 읽고 나니까 장편 소설(특히 최근 작)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수록된 단편들이 세기말이나 초에 나온 것들이라, 클리셰라고 느껴질 만한 전개가 종종 나온다.
그래서 미스터리 매니아라면 쉽게 뒷내용을 예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껏 읽은 미스터리 소설 중에서도 여성 중심의 서사를 다룬 작품은 거의 없었기에,
이번 기회에 읽을 수 있어서 좋은 경험이었다.
이 작가분께선 가독성 좋고 흥미를 불러 일으킬 만한 제목을 짓기 위해 많이 노력한다는데,
내가 쓴 스토리 요약을 읽은 뒤 각 단편들의 제목을 다시 한 번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1. 남편을 죽이는 30가지 방법
미연은 순종적인 아내로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위압적인 남편을 죽일 방법을 매일매일 가계부에 적어 나가고 있다. 이미 미연의 상상 속에서 수백 번도 더 죽은 남편.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정말로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미연은 자신이 남편을 죽였다며 자수하지만, 감식 결과 여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가 살해당했음이 밝혀진다. 김 형사는 미연의 정신병원 담당의 명준을 찾아간다. 그리고 미연이 실제로 남편을 살해한 것이 아님에도, 상상만으로 남편에 대한 살해욕을 충족하는 증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미연은 결국 풀려나고, 명준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명준은 '완전 범죄' 라는 말을 하며 웃는다. 미연도 따라 웃는다.
오늘도 설탕과 프림을 정확한 비율로 넣어 탄 커피와 일간지 두 부, 그리고 목요일 아침에 배달되는 주간지 한 권. 더이상 필요한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준비해두었는데도 남편은 소리 없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남편을 죽이는 방법을 생각해낼 때마다 그녀는 마치 글을 깨치는 어린아이처럼 신기한 기분을 느꼈다.
"틀림없이 자기가 남편을 죽였다는 거야. 근데 그 방법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
"자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남편에 대한 숨막히는 무게감을 느끼게 하는 도입부의 상황 묘사가 좋았다.
마지막 명준의 "완.전.범.죄!" 가 너무 쌍콤해서 웃어버렸다...
2. 거울 보는 남자
그는 일용 잡부이다. 그날도 눈먼 아내가 가져오는 잡지를 읽는 도중,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칼럼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는 저자를 만나기 위해 한 대학교의 연구실로 찾아간다. 칼럼의 저자인 정 교수는 벽에 거울을 달기 위해 못을 박고 있었다. 어설퍼 보이는 교수를 대신해 못을 박아 주고는, 따지기 시작한다. 어째서 범죄자에 관상이 있다는 내용의 칼럼을 썼냐는 것이다. 학창 시절부터 외모 때문에 차별을 받아왔던 그. 결혼도 늘그막에 눈먼 여자와 겨우 했다는 그. 게다가 살인자의 관상이라고 수록되어 있던 이미지는 그와 너무 닮아 있었다. 언쟁이 격해지다가, 그는 교수를 밀친다. 하필 교수는 벽에 튀어나온 못에 머리를 박고 사망한다. 패닉에 빠진 그는 곧 벽에 걸릴 예정이었던 대형 거울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잡지를 빌리러 간 아내를 보며 옆방 사람들은 그를 욕할 것이다. 아내가 남편을 위해 잡지를 빌리러 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아내가 잡지를 필요로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아내가 맹인이란 것과 서술자가 형편없는 남편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설명해주는 너무 좋았던 문장)
그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거울 앞으로 다가가 가만히 그 속을 들여다 보았다. 한순간 자신의 얼굴 저 너머에 살인자의 얼굴이 보인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 건 다만 그의 착각이었을까?
특유의 눅눅한 분위기와 자연스러운 흐름 덕분에 마음에 들었던 단편.
주인공은 누가 봐도 찌질하지만 능숙하게 교수의 못을 박아주는 전문적인 면도 보여준다.
쌍판이 다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 서술 같아서 뭔가 기억에 남았다.
3. 못생긴 생쥐 한 마리
소설 작가인 기석은 최근 원고 작업이 순탄치 않아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결혼 생활도 지겹기 짝이 없었던 그의 유이한 낙은 외도 상대인 혜영, 그리고 속을 터놓을 만큼 친한 친구 현철 뿐. 그러던 와중 그는 어느 날 협박편지를 받는다. 요구사항도 없는 편지에 점점 숨통이 조여오는 기석. 결국 심리적으로 한계까지 몰린 순간, 혜영과 현철 모두 그를 부정한다.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그는 서재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고 사인은 자살로 처리된다. 장례식 이후, 기석의 아내는 현철과 만난다. 더 이상 그 둘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었다.
기석은 자신이 혜영과 만나게 된 데 대한 책임이 아내에게도 있다고 생각했다. 십 년의 결혼생활 동안 아내는 점점 여자 아닌 여자로 변해갔다. 권태기가 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기석은 아침에 일어나 잠든 아내의 얼굴을 보면 짜증이 났다. 이 지겨운 얼굴을 평생 봐야 한다는 생각에 인상을 한두 번 찡그린 게 아니었다.
'왜, 당신의 남편이 미친 것처럼 보이나? 그래, 난 미쳤어. 당신의 소설을 훔쳐 문단에 데뷔한 그때부터 난 이미 미쳐 있었는지도 모르지.'
"그가 내 소설로 신문사 공모에 당선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난 그를 용서할 수 있었어요.
...
하지만 이혼이라는 말을 꺼냈을 때는 정말 참을 수가 없었어요. 자기가 누구 때문에 그 자리에 올랐는데 이제 와서 이혼이라는 소릴 해요?"
불안감 조성을 통해 서서히 남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아내에 대한 내용.
가스라이팅이라는 개념이 널리 알려지지 못했던 시기에 쓰였을 테니,
지금 시점에선 신선하단 느낌은 다소 적었다.
마지막 반전이 '남편을 죽이는 30가지 방법' 과 비슷하지만,
이번 주인공은 남편이 먼저 아내를 줄기차게 배신했으니 그래도 싸다(...)는 생각이 든다.
4. 살인 협주곡
남편은 기분이 좋다. 이번 휴가에서 드디어 아내를 죽일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아내 또한 기분이 좋다. 이번 휴가에서 드디어 남편을 죽일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부부는 휴가 장소인 외딴 별장에 도착한다. 남편은 아내를 사고로 위장해 밀어버릴 벼랑을 점검한다. 아내는 손가방에 준비해 둔 독약을 언제 남편의 요리에 탈지 고민한다. 그리고 밤이 되었다. 즐거운 마음에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눈 둘은 장작불을 보며 왠지 처음 사랑했을 때의 그들이 떠오른다. 어쩌면, 아내를, 남편을 죽이지 않고도 좀 더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 때, 갑자기 억수같이 폭우가 쏟아진다. 남편은 심한 열병에 걸리고, 아내는 도움을 요청하러 밖으로 뛰쳐나간다. 남편은 자신을 위해주는 아내에게 감동하며 더 나은 미래를 다짐한다. 아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벼랑으로 떨어져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다는 것도 모르고, 그는 아내의 손가방에서 진통제를 찾아 먹는다. 그게 진통제가 아니라는 것도 모른 채.
사실 그가 여행을 가자는 얘기를 꺼냈을 때 나는 잠깐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이 남자가 무슨 꿍꿍이로 이런 제의를 하는 것일까? 식어버린 관계를 다시 되돌려보고 싶다는 얘기인가?
'당신이란 사람은 늘 그 모양이야. 늘 너무 늦게 바로잡으려고 하지... 이미 엎질러진 물인 줄도 모르고...'
나는 다시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벽난로에 희미하게 남아 타고 있는 불씨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남편과 나 사이도 이 장작불처럼 새롭게 타오를 계기가 필요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단막극 같은 내용. 이런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같은 비극을 좋아한다.
5. 그녀만의 테크닉
진아는 지영의 남자친구인 경민을 별장으로 납치한다. 진아와 경민은 하룻밤을 보낸 사이로, 진아는 학창 시절 연인처럼 가까웠던 지영의 남자들에게 매번 접근한 것이었다. 한편, 진아는 한 스토커에게 쫓기고 있다. 그는 진아를 지켜주겠다고 말하는 남자로, 진아의 손등에 상처를 입힌 원숭이 키키의 손목을 꽃바구니에 보내는 잔인한 사람이었다. 뜻밖에도 스토커는 진아가 지영의 이전 남자친구를 살해해 묻은 것도, 그리고 진아가 기어이 경민까지 살해한 것도 알고 있었다. 경민이 진아의 별장으로 간 것을 눈치챈 지영은 그곳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진아를 안심시키고 상처를 치료해준다. 진아는 얌전히 지영의 손길을 따르다가 경민과 마시려던 와인을 건넨다. 하지만 그 와인엔 이미 스토커가 치사량의 약품을 타 둔 상태였다. 차갑게 식어가는 지영을 보며 진아는 절규한다. 그리고 스토커인 줄 알았던 그 남자가 사실은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웃고 있는 사진 속 지영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녀는 한 가지 무서운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다. 지영은 이미 그녀가 이 사진을 보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언젠가 그녀가 이 사진을 발견하게 되길 바라며 의도적으로 사진을 찍고 여기에 붙여둔 것이다.
(진아가 제정신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초반 문장)
원숭이 죽었을 때부터 진아가 죽인 게 아닐까 하고 어렴풋이 예상됐다.
해리성 인격 장애는 최근엔 각종 작품에서 흔히 다루는 증상이기 때문.
후반부는 조금 문어틱한 대사와 작위적인 분위기(와인 등 다소 올드한 소품) 때문에 조금 아쉬웠다.
6. 반가운 살인자
벌써 여섯 번째다. 최근 비 오는 목요일마다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나는 살인범을 만나기 위해 비 오는 목요일 밤마다 우의를 입고 밖에 나간다. 나의 목표는 하나, 그에게 살해당하는 것이다. 5억이 넘는 빚을 지고 2년만에 집에 들어와 아내에게 빌붙어 사는 백수 남편인 내가 딸 하린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내 생명 보험금 뿐이니까. 그리고 결국 나는 살인범을 마주한다. 나는 그를 도발하고, 그는 나를 칼로 찌른다. 죽어가는 나의 핸드폰이 울린다. 발신자는 하린이다. 살인마는 내 귀에 핸드폰을 대 준다. 하린이는 나의 계획을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죽지 말라며, 아빠만 있으면 된다며 울먹이는 목소리가 이내 끊어지고, 나는 끝내 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지 못한 채 마지막 힘으로 살인자에게 속삭인다. '반가웠어, 살인자.'
나의 목적은 간단하다. 연쇄살인범의 손에 살해당하는 것. 그러면 하린이 앞으로 육억이라는 보험금이 지급된다. 수혜자를 변경했다는 사실을 알고 아내는 이를 갈겠지만, 내 목숨의 대가를 누구에게 줄 것인지 정도는 내가 정해도 되는 일 아닌가?
몸 밖으로 나온 뜨거운 피는 비를 맞아 빠르게 식어간다. 비와 섞인 피는 도로에 고이다가 하수구를 찾아 흘러간다.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은 빗물에 씻겨 하수구로 내려간다. 별 볼일 없던 서른아홉 살 사내의 생명도 이렇게 하수구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밑에 다른 단편에도 비슷한 문장이 나온다.
(작가 피셜) 정남규 사건을 모티프로 한 작품. 영화판도 있다.
다른 단편들과 달리 꽤나 단순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범인을 목격했음에도 목적을 위해 일부러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점에서 좋은 사람이라곤 볼 수 없으며,
딸에게 사랑하는 아빠가 죽었다는 큰 상처를 안겨준 점에서 좋은 가장이라고 볼 수도 없다고 본다.
소재가 독특하고, 읽고 나서 씁쓸했던 단편.
7. 숟가락 두 개
상철은 석태의 시체를 토막내 유기한다. 절도 전과 13범인 그는 해장국 집에서 일하는 윤희와 한 집에서 산다. 누구보다 소중한 윤희를 위해 큰 곰인형 선물을 사들고 홀린 듯 성당에 들른 그는 고해성사를 할까 했지만, 이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나와 버린다. 사건을 조사하는 강 형사는 상철이 윤희의 수양아버지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크리스마스를 윤희와 보낸 뒤 상철은 자수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당일, 윤희가 경찰서에 먼저 찾아가 버린다. 말을 못 하는 윤희는 석태를 죽인 게 자신이라고 쓴 종이를 보여준다. 상철의 감방 동기인 석태는 윤희에게 몹쓸 짓을 했고, 윤희는 등을 돌린 그에게 화분을 내리쳐 죽였다고 한다. 하지만 뒤늦게 경찰서에 도착한 상철은 윤희를 도망치게 하고 자신이 석태를 죽였다는 상반된 증언을 한다. 두 사람을 보던 강 형사는 가족이 사라진다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그동안 위태로웠던 아내와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단 한번도 가족이 없었던 상철은 생전 처음으로 사랑하는 가족과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었다.
그러면 평생 평범하게 살면서 누리는 것 하나 제대로 가져보지 못한, 이 빌어먹은 개 같은 인생을 만들어준 조물주를 조금은 용서할 마음이 생길 것 같았다.
강 형사의 집 식탁에도 숟가락 두 개가 있었다. 그리고 잠시 숟가락이 세 개로 늘었다가 다시 두 개로 줄었다. 가족을 잃는다는 건, 특히 자식을 잃어버린다는 건 제 살을 도려내는 아픔이라고 했다.
앞부분에 상철이 윤희와 연인 관계인 것처럼 오해하게끔 서술되어 있는데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양아버지와 딸이라는 따뜻한 관계성이 너무 판타지 같았던 단편.
'청맹과니' 라는 단어가 나온다. (구글발 뜻: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나, 실상은 보지 못하는 눈)
8. 서울 광시곡
정한은 <라디오 추리극장> 의 작가이다. 프로그램의 1화는 병원장의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4일 뒤, 실제 한 병원의 원장이 드라마와 같은 방법으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2화는 건설업체 사장 살인 사건이다. 이번에도 한 건설업체의 사장이 같은 방법으로 살해당한다. 자연스레 의심을 받게 되는 정한. 뚱뚱한 체격을 가진 강 형사가 그를 찾아온다. 강 형사는 정한의 과거를 캐고, 그가 피해자들에게 원한을 갖고 있음이 밝혀진다. 그러나 정한과 같은 녹음실에서 일하는 기철 또한 피해자들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건 동일했다. 결국, 정한은 기철에게서 자백을 이끌어 낸다.
사람들은 무언가 분노를 쏟아붓고 미워할 대상을 찾고 있었다. 날씨라는 도무지 대항할 수 없는 존재에 어쩌지 못하고 상한 마음을 보상받을, 그 무엇인가가 필요한 것이다. 충혈된 눈으로 먹이를 찾는 그들에게 <라디오 추리극장>은 좋은 위안거리였다.
거대한 존재들에 대한 자신의 살의를 극본 집필로써 해소해 왔던 정한에게도 빗댈 수 있는 서술이라고 생각.
'남편을 죽이는 서른 가지 방법' 의 미연처럼 다른 세계에서 살인을 행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하지만 유일하게 속 시원하게 이해가 잘 안 됐던 단편.
기철이 체포됐음에도 정한이 왜 이전에 자신이 범인임을 가책하는 꿈을 꿨는지에 대해선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강 형사의 모티프는 아무리 봐도 '형사 콜롬보'...
9. 비밀을 묻다
1. 나는 남자를 죽였다. 이제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다. 그 사람에겐 말하지 않았다. 끔찍한 기억을 느끼는 건 나 하나만으로 족하다.
2. 나는 지영의 남편 기환이 죽었다는 것을 들었다. 나는 지영이 가진 건 뭐든 뺏고 싶었다. 그래서 기환을 유혹했었다. 지영은 이제 기환의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을 것이다. 그게 질투 나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지영의 집으로 찾아갔다. 지영의 집엔 못 보던 여자가 있었다. 아무래도 지영이 그 여자를 이용해 남편을 죽인 것 같다. 지영의 것을 더 뺏을 수 있는 기회다. 증거물을 들고 다시 지영의 집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왜인지 그 여자는 내 정체와 계획을 모두 알고 있었다. 내 차에는 독이 들어 있었으나, 알아챘을 땐 이미 너무 늦었다.
3. 나는 프라하에서 지영을 만났고, 우린 서로 사랑하게 됐다. 성 정체성을 깨달은 지영은 그날부로 남편에게 이혼하자고 말했으나, 돌아온 건 폭력이었다. 나는 지영을 지켜주기로 결심했고, 그 계획을 실행했다. 이제 나는 지영과 함께할 수 있게 됐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는 자신의 뇌도 꺼내서 주름진 골마다 새겨진 그 남자의 마지막 잔상들을 털어내고 맑은 물에 흘려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씻어버릴 수도, 도려낼 수도 없다. 저 하수도처럼, 끔찍한 기억들을 흘려보내고 눈에 띄지 않게 모아두는 곳은 없을까?
서술자가 계속 바뀌는 1인칭이라 조금 헷갈릴 수 있다.
1과 3의 서술자는 같은 사람이며, 2의 서술자를 살해한 인물이다.
제목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데, B가 A에게 기환을 살해했다는 비밀에 대해 '묻는' 장면이고,
A가 B를 살해한 후 땅에 '묻는' 장면을 뜻하기도 한다.
성소수자 이야기라 그렇지 살해당한 사람들 행적을 생각해보면 전형적인 권선징악 / 순애(?) 내용.
10. 경계선
고등학생인 나, 작년까지 나는 소위 말하는 왕따였다. 이번에도 첫날부터 패거리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그 때 한 여학생, 효리가 나를 도와준다. 효리에 대해 궁금해진 나는 효리를 따라다니다가 그가 사복으로 갈아입고 중년 남자의 차에 탑승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이후 나는 효리와 같이 술을 마시기도 하며 조금 가까워진다. 하지만 나는 효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 그건 며칠 전, 동네 뒷산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 날 동급생 무리가 나를 끌고 가 폭행했다. 나를 쓰러트린 직후, 그들은 본드를 흡입한다. 그러다 한 녀석, 윤수가 목숨이 위태한 상태에 이르렀다. 겁에 질린 나머지는 본드에 취한 채로 도망갔고, 나는 죽어가는 윤수를 보고도 그냥 방치해 죽게 만든 것이다. 그래도 나는 혐의점 없이 풀려난다. 그러나 왜일까? 내가 살인자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오자 효리는 조금 실망한 눈치였다. 얼마 후 효리가 불러 모텔로 간 내가 본 건 욕조에 머리를 박고 죽어 있는 중년 남자의 시신이었다. 그는 효리 어머니의 애인이었다. 그의 사인이 사고사로 판명됨에 따라 효리도 나처럼 무죄로 풀려났고,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효리도 나와 같지 않을까. 우리 둘은 모두 경계선에 서 있지 않을까 하고.
나는 그가 어떤 질문을 할지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왜 죽였어?"
가장 먼저 대답하고 싶은 질문이다.
"그냥, 심심해서요."
그가 나를 괴롭힐 때 가장 많이 하던 말이다.
윤수의 핸드폰을 가져온 건 그렇다 쳐도, 윤수의 시체가 발견되고 경찰서에 끌려갔을 때 나는 살인범 흉내를 내고 싶어했다. 어쩌면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날 내 행동으로 윤수가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을까? 또다른 한편으로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그날의 기억을 지운 것은 아닐까?
돌아가는 길에 윤수의 핸드폰을 강물에 던지면서 효리에 대한 의구심도 같이 던져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가장 현명한 결론이다.
뜻밖의 행운을 맞은 불행한 고등학생들을 다룬 단편.
11. 이제 아무도 울지 않는다
나는 조용한 새 집을 구했다. 하지만 최근, 평화를 위협받고 있다. 매일 밤마다 고양이가 창문가로 다가와 울기 때문이다. 그 아기 울음 소리에서 나는 끔찍한 옛 기억을 떠올린다. 나는 일하는 편의점에서 참치 캔을 사서 고양이를 집 안으로 유인하고는 손에 든 가위를 빛낸다. 이제 고양이는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앞으로는 편히 잘 수 있겠지. 한편 그런 나에겐 또 다른 고민이 있는데, 매일 한 남자가 일터에서 말을 건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린 여자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질투를 느끼기도 했다. 혹시 나는 이 남자에게 호감을 느낀 것일까? 그는 혼자만의 시간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내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나는 남자에게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는 참치 캔처럼 남자를 쉽게 유인했다. 나는 그때처럼 가위를 집어들었다. 이제 아무도 울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는 창문을 닫아둘까 하다가 고양이라면 친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밑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그녀의 귓가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끈질기게 매달린다.
입체적이고도 캐릭터성이 확실한 여주인공이 매력적이었다.
12. 잔인한 선택
나는 동창 지영의 연락을 받고 선경의 장례식에 참석했고, 선경의 약혼자 민우와 어색한 인사를 나눈다. 장례식 이후, 나는 연락을 해온 민우와 만났고, 왠지 마음이 조금 부풀기도 했다. 내 차에 탄 그는 어딘가로 가자고 말한다. 도착한 그곳은 선경이 사고를 당한 장소였다. 그리고 그는 내게 묻는다. 왜 선경을 죽였느냐고. 민우는 의구심을 가지고 홀로 선경의 사건을 조사했던 것이다. 하수구에서 뺑소니 차량의 조그마한 파편을 찾은 그는 카센터와 자동차 공장을 돌아다니며 결국 답을 내고야 말았다. 나는 과거를 떠올린다. 선경과 나는 대학 시절 친구였다. 하지만 내가 민우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알고서도 선경은 일부러 민우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내가 선경을 죽이던 그 날, 선경은 우연히 만난 내게 웨딩드레스를 골라달라고 했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내게 말했다. '내가 그랬지? 마음만 먹으면 네가 가진 거 뭐든 뺏을 수 있다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조수석에 앉은 민우의 팔을 뿌리치고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액셀을 밟았다. 이제, 선경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차례였다.
선경의 집으로 향하는 자동차를 바라보며 민우는 허약한 인간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벽돌 하나만 빼버리면 와르르 무너져버리는 관계들. 선경이라는 벽돌이 있었기에 유지되던 선경 부모님과의 관계는 선경이 사라지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남자들은 모른다. 여자의 우정에는 경쟁심이라는 것이 독버섯처럼 자란다는 것을. 그래서 가장 친한 친구가 때로는 가장 무서운 적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을.
여고 동창 살인사건으로 알려진 거여동 밀실 살인 사건을 생각나게 하는 단편.
플롯 자체는 특별할 게 없어서 이전 단편에 비해 기억에 남는 장면이나 묘사가 많지 않았다.
이 단편집에서 가장 아쉬웠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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