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번째로 읽은 편혜영의 단편집.
주로 도시 속 현대인의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을 건조하게 (조금은 공포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1. 토끼의 묘
6개월 간 파견 근무를 온 '그'는 공원에서 버려진 토끼를 발견하고는 무심코 집으로 데려온다.
그에게 파견 근무를 추천한 선배는 어느 날부터 회사에 출근하지 않기 시작한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 그는 고의로 서류의 수치를 잘못된 값으로 바꾸지만 질책받는 일이 없었다.
그는 출근도 고의로 빼먹지만 아무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는다.
그 후 그는 그의 후배에게 파견 근무를 제안하는데,
자신의 선배와 같은 말로 추천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고 해서 토끼를 키우는 일이 아예 무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무표정하게 누군가를 오랫동안 응시하다가는 결국 미움을 사고 만다는 걸 토끼가 알려줬다.
출근을 하지 않았지만 평일 대낮에 집에 있는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는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집에서 할 일이라고는 토끼를 쳐다보는 것밖에 없었으나 토끼의 빨간 눈이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토끼 케이지에 검은 천을 덮어두고 책상에 앉아 회사에서 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무한 굴레의 지옥에 빠진 직장인의 이야기.
6개월간의 파견 근무를 끝내며 주인공은 토끼를 공원에 다시 놓아준다.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날 순 없을 것이다.
그의 후배에 의해 다시 같은 집으로 들어가게 될 토끼처럼 말이다.
막연한 기대 이후 결국 도달하는 무의미함에 '토끼 사육' 이라는 상징물을 가져온 것이 인상적이었다.
무관심 속에서 책임을 놓아버리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2. 저녁의 구애
'김'은 옛 친구의 전화에 화환을 만든다. 김에게 도움을 줬던 은사가 위태한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은사는 숨이 끊어지지 않았고 배송지에 도착한 김은 그가 죽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 와중에 자꾸 연락이 오는 여자에게 그는 이별하자는 이야기를 애써 참는다.
김은 어둠이 내린 국도를 걷다가, 갑작스레 한 트럭이 미끄러지더니 불길에 휩싸이는 광경을 목격한다.
그는 구급대원에게 전화를 거는 대신, 여자에게 전화를 걸고는 투박한 사랑 고백을 읊기 시작한다.
'은사의 장례식', '화환', '김과 친구와의 관계성' 등 맥거핀이 상당히 많은 단편.
그래서 글이 나타내는 주제를 간파하기 쉽지 않았다.
이 단편집의 큰 주제가 '동일성의 지옥' 이라는 것을 고려해 추측해 보자면...
그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 '사랑' 일 거라고 판단했기에 김은 '구애' 라는 방식으로 몸부림을 쳤던 것이다.
그게 정답이더라도, 김은 여자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니 탈출이 가능할지는 의문이 든다.
3. 동일한 점심
복사실에서 일하는 '그'는 정오가 되면 꼭 구내식당으로 가서 정식 A세트를 먹는다.
어느 날은 구내식당에서 매일 마주하지만 친분은 없는 사내가 지하철 선로로 몸을 던진다.
그는 복사실에서 사내와 짧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다른 매일처럼 같은 시간에 열차를 타고, 복사실에 들어가고, 제본을 한다.
정오가 되어, 그는 다시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같은 일상이 반복되다못해 주인공은 복사기보다 더 복사기처럼 되어버렸다.
복사기는 매번 다른 내용을 복사하기라도 하지만 주인공의 하루하루는 같은 내용만 복사되고 있으니.
복사실에서 그가 본 것은 정말로 남자의 영혼이었을까?
남자가 바라던 것이 고작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이었다면,
그 또한 얼마나 반복되는 삶을 살고 있었던 걸까?
죽어서야 그 지옥에서 벗어났을까?
아니면 죽어서도 그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멀리서 보면 같아 보이면서도 각자 복잡한 생각을 품고 있는 개개인,
사람들로 북적이면서도 외로운 도시 특유의 모습 등,
곱씹어 보면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단편.
화면 속에서 그는 아주 작은 사람으로 보였다.
...(중략)
사람들은 어항 속 금붕어처럼 고요하지만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여대고 있었다. 화면 속의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종이에 살갗을 베는 일이 유일하게 상처가 되는 곳에서 복사광의 온기에 위로받으면서
4. 관광버스를 타실래요?
두 사람, 케이와 에스는 큰 자루 하나를 절대 열어보지 말고 운반하라는 임무를 완수한다.
택시 기사의 질문에 쌀이라고 둘러댄 것으로 봐서,
심상치 않은 내용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업무에 두 명을 붙인 게 아닐까 했다.
엇비슷한 두 사람이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도록.
5. 산책
'그'가 이사한 곳엔 큰 개가 있다.
집주인은 멧돼지를 쫓아내는 좋은 개라고는 하는데,
임신한 아내는 너무나도 크고 활발한 개를 두려워하며 눈물을 보이기까지 한다.
그는 개를 데리고 숲에 산책을 나간 뒤 독을 탄 음식을 먹인다.
숨이 끊어진 개를 등지고 그는 돌아가려 하지만 숲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를 둘러싼 숲의 어둠은 짙었고, 날벌레는 맹렬했으며 이제는 점차 눈까지 감겨왔기 때문이다.
"대자연의 지엄한 복수"...
...같은 평면적인 해석을 해보자면...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만 플롯이 조예은의 '습지의 사랑' 과 비슷한 것 같다.
다른 단편들은 대부분 배경이 도심이었으나, 이 단편만은 외곽을 다룬다.
이 작가의 세계관에선 안전하고 안락한 곳은 정녕 없단 말인가?
6. 정글짐
낯선 나라의 도시로 출장을 와서 길을 잃고 헤매는 한 사내.
숙소로 돌아가는 길을 잊어 오랜 시간을 바깥에서 보내던 그는 정글짐을 발견하고 올라 본다.
성취감은 얻을 수 없었고, 볼썽사납게 헛디뎌 미끄러져 상처를 입기나 한다.
다시 발걸음을 옮긴 그는 두려움을 참고 정글짐 꼭대기에 올라가 떨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정글짐이란 건 주변에 휩쓸려 성취한 직업이나 허울뿐인 명성을 뜻하는 것일수도 있겠고,
정말 말 그대로 낯선 장소나 사람이 주는 두려움과 공허함, 소외감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근데 작가가 정말로 그걸 의도했는지는 모르겠고,
읽다 보면 내가 길을 잃은 것처럼 답답하고 불편한 기분이 든다. 그걸 노린 것만은 알겠다.
피켓에 적힌 잘못된 표기가 오랜 비행으로 인한 피로와 낯선 도시에서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농담으로 여겨졌다.
"부럽군. 나도 항상 이렇게 불쑥 떠나고 싶었는데 말이야." 그 역시 멋대로 불쑥 떠나라고 말할 수 있는 백이 부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전략) 신문 기사의 뒷부분이 마저 떠올랐다. 이 도시에서는 행인에게 길을 물어보면 세 명 중 한 명은 여행자를 놀리기 위해 일부러 틀리게 가르쳐준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재수 없게도 세 명 중 한 명을 연달아 두 번 만난 셈이었다.
메롱시티 절망편
7. 크림색 소파의 방
몇 달간의 지방 출장 근무를 끝마친 '진'은 아내 '서'와 어린 아기를 데리고 차에 오른다.
비도 오는데 와이퍼가 고장나고, 겨우 허름한 주유소에 도착한 그는 한 청년에게 수리를 부탁한다.
용건을 끝내고 돌아가려던 진에게 청년은 험악한 본성을 드러내고, 진은 수리비 명목으로 돈을 빼앗긴다.
경찰에 청년 무리를 신고하고 그곳을 벗어난 진은 애써 좋은 생각만 하려고 노력한다.
크림색 소파를 비롯한 새 가구들로 찬 새집을 곧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이삿짐 센터에서 전화가 걸려온다. 소파가 도저히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달리던 차가 갑자기 멈춘다. 진은 청년의 소행이라 생각하였고, 보험회사에 전화를 건다.
곧 차가 한 대 도착한다. 하지만 그건 보험회사 직원이 아닌 아까 그 청년이었다.
둔기로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은 진은 이것 또한 지나갈 시련이라 생각하지만, 의식은 점점 사라져 간다.
현재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 불행한 사나이의 이야기.
크림색 소파가 새집에 들어 맞지 않았던 것에서부터,
그가 원하던 행복한 미래는 손에 잡히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예견할 수 있다.
아내와 아기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묘사되지 않지만,
아마 진처럼 끔찍한 결말을 맞을 거라 추측되어 더 잔인했던 단편.
교훈: 어느 정도의 정비 지식은 필요하다
진은 그 소파에 누워 있는 아이들의 평온한 표정이 곧 제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가 크림색 소파를 고른 것도 그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진은 서에게 전화를 바꾸어주었다. 서는 소파를 거실 왼쪽 벽에 바짝 붙여 놓으라고 일러주었다. 전화는 끊어졌다가 잠시 뒤 다시 울렸다. "죄송합니다. 소파가 그 자리에 들어가지 않아요. 어떻게 해봐도 거실에 들어가질 않습니다."
웃음 끝에 진은 언젠가 이런 일을 겪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자 얻어맞은 부위의 통증이 계속되는데도 다소 안도감이 들었다. 기억할 수 없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통증이 가라앉으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이전의 세계 어디쯤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였다. 진은 자신이 단지 하나의 위기를 만났고, 얻어맞음으로써 그 위기를 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8. 통조림 공장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통조림 공장의 공장장이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게 된다.
꽁치 통조림 밀봉 담당의 '박'은 공장장과 했던 대화를 상기한다.
공장장은 박에게 가끔 개인적인 일을 시켰다.
그러면 박은 반찬을 깡통에 밀봉해서 외국에 있는 아내와 딸에게 보내고는 했었다.
공장장이 실종된지 몇 개월이 지난 뒤, 박은 새 공장장이 된다.
자연스레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게 된다.
그 후 박은 공장장의 방에 있는 통조림 깡통을 하나씩 열어본다.
깡통에 든 것은 음식 뿐만이 아니었다. 양말과 속옷 뭉치, 송금 내역서, 딸에게서 받은 편지도 있었다.
혹시나 정체 모를 뼈와 살덩어리를 발견한다면, 공장으로 가서 조용히 밀봉하곤 한다.
통조림 공장이라는 제목만 보고 사람을 통조림 안에 넣는 엽기적인 내용일 거라고 추측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맞긴 한데 그걸 조금 더 낭만적(?)으로 풀어낸 단편이었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연쇄적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토끼의 묘' 와 비슷하다.
집에 있는 수많은 통조림 깡통들은 공장장이 반복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친 흔적 같았다.
무서울 정도로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 도착한 곳이 깡통이라는 건...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까? 아니면 고등어 통조림에 고등어가 아닌 다른 것을 넣음으로써,
반복되는 미래에 대한 예측을 타파한다는 목표를 완수한 것일까?
씹고 있는 통조림의 맛처럼 삶이 너무 자명해진 느낌이었다. 미래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지나버린 것 같았다.
산 것을 죽여서 가공한 후 죽지 않게 밀봉 처리하는 것. 그러니까 죽은 것을 상하지 않게 가공처리하여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 이것이 밀봉 기술의 핵심이거든요.
어느 날인가 피냄새에 섞여 곯은 내를 풍기는 정체 모를 뼈와 살덩어리 같은 게 나온다면, 어쨌거나 공장장은 죽은 개를 밀봉한 적도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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