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은이 : 김내성
무려 1939년에 조선일보에서 연재됐던 한국 최초의 장편 탐정소설이다.
제목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읽게 된 계기는 지난번 포스팅도 했던 <세계 추리소설 필독서 50>이다.
조선 최고의 무희 '주은몽'은 자산가 '백영호'와의 약혼을 기념하기 위해 가면무도회를 개최한다.
무도회가 한창일 무렵, 주은몽이 어릿광대 분장을 한 괴한에게 칼로 찔리는 사건이 일어나고,
며칠 후 진행된 결혼식에서는 범인에게 협박을 받은 피아니스트가 장송곡을 치는 소동이 벌어진다.
곧이어 도착한 협박장. 범인은 자신을 '해월'이라고 소개한다.
주은몽은 분명 그 자를 알고 있다. 그녀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그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는데...
우선 근대소설 특유의 고풍스러운 문체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소설의 문장이 무척 내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여태껏 읽었던 책 중에서 칠한 하이라이트가 가장 많다.
더구나 그것이 힘만 있으면 누구든지 딸 수 있는 야생화가 아니고 장래의 남편 백영호라는 울바자 안에 찬연히 피어 있는 달리아인지라 사람들은 더한층 흥분과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아, 사람의 죽음을 기원하면서도 한편 그것을 애도하는 듯싶은 저 저릿저릿한 목탁 소리여! 전신을 치렁치렁한 주홍빛 망토로 감추고 조는 듯한 가는 눈과 귀밑까지 찢어진 가는 입을 가진, 그 어릿광대의 가면을 쓴 무시무시한 악마여!
보니, 약 100미터 앞을 나는 듯이 달음박질치는 이선배...... 실크햇을 젖혀 쓰고 단장을 거꾸로 잡은 이선배의 그 늘씬한 뒷모양이 조는 듯한 전등 밑을 희뜩희뜩, 마치 재봉침으로 누비는 듯이 번쩍거린다.
...(중략)
고적한 밤공기를 울리는 경찰들의 패검(佩劍) 소리가 채칵 채칵 채칵......
그때 이선배가 힐끗힐끗 돌아다보면서 왼편 골목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본 박 부장은,
"오냐! 이젠 네가 포대에 든 쥐로다!"
하고 외쳤다.
긴박한 상황을 비유로 실감나게 표현하면서도 위트를 잃지 않는 문단.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았다.
마치 이야기꾼이 독자에게 해설해주는 듯한 전지적 시점이 특징이다.
ex) '그러므로 독자 여러분은 이 점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이런 부분들은 개인적으로 재미있었다.
아무래도 100년이 다 돼가는 소설이라 내용적으로는 좀 얕봤던 게 있다.
앞부분에 가면무도회나 어릿광대, 장송곡 같은 자극적인 소재가 잔뜩 나와서 고작해야 흥미나 끌어낼 목적이거니 생각했는데,
레드헤링을 이렇게 많이 썼을 줄은 몰랐다.
혹자는 오래 된 소설이라 뒷내용을 예측하기 쉬웠다고 하는데,
나는 초중반 오상억 변호사가 밝혀낸 정보야 그랬지 유불란이 밝혀낸 사실들에는 그저 깜짝깜짝 놀라기만 했다...
저절로 겸손해짐.
또한 이 작품은 현대인의 눈으로 봐도 개성이 상당했다.
가장 특이한 건 역시 탐정일 것이다. 보통의 추리소설들은 탐정이 강렬한 존재감을 내비치는데,
이 소설에서의 탐정 유불란은 분량의 3/4 무렵까지 도대체가 사건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가 않는다.
오히려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찌질한 모습으로 수사에 혼선을 주기나 한다는 것이다.
한동안은 오상억 변호사가 탐정인지 이 양반이 탐정인지 혼란스러웠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명작에 나오는 명탐정들은 거의 다 연애를 모르는, 글자 그대로의 목석 같고 기계 같은 초인적 인물이다. 그러나 유불란 탐정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보통 사람과 같이 연애할 줄 알고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질투할 줄 아는, 말하자면 피가 도는 인간이다. 하나 이처럼 노골적으로 은몽과 오상억 사이에 관심을 두는 것은 처음이다.
그 때의 명탐정이라 하면 오귀스트 뒤팽, 에르퀼 푸아로, 셜록 홈즈, 아케치 코고로 등등일 텐데,
유불란은 모리스 르블랑에서 이름을 따온 만큼 행동이나 성격으로 봐도 괴도 뤼팽에 더 가깝다는 게 독특한 점이다.
또 하나 특이한 건 서사적인 부분인데, 악인이라 생각되던 사람이 실은 선인인 경우가 있었다.
반대의 경우가 대부분인 미스터리 소설 특성상 흔치 않은 전개였다.
전개나 트릭에 있어서도 눈에 띄게 어색한 부분은 찾지 못했다.
당연히 과학수사가 발달한 현대소설에 비하면 시대배경이 유리하긴 하지만,
클로즈드 서클이 아니고 심지어 경찰도 내내 상주하는데도 사건이 벌어지는 놀라운 전개를 보여준다.
물론 우연에 의존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님. (임 경부가 탄 경찰차가 하필 신호에 걸렸다거나...)
서술 트릭도 치밀한 편인데,
예시를 하나 가져왔다.
그때, 그는 어쩐지 가슴이 이상하게도 두근거림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런가 하면, A의 얼굴을 때때로 곁눈질해 보는 B의 두 눈에서 그 어떤 잔인성을 임 경부는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잔인성이라는 단어로 독자들로 하여금 B를 의심하게 만드는데,
나중에 알고 보면 사실 선량한 B는 A가 범인임을 의심하고 있기 때문에 저런 표현이 나온 거였다.
그리고 또다른 엄청난 장점이 하나 있는데 소설 도입이 따분하지 않다.
많은 미스터리 소설들이 사건 일어나기 전 앞부분 빌드업(떡밥 뿌리는 부분)이 재미가 없다.
반면 이 소설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건으로 긴장감을 잃지 않는데,
그렇다고 엄청나게 자극적이지도 않은 건강한(?) 서스펜스라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다.
자칫하면 흐름을 잃기 쉬운 과거 이야기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가 여러 번 나오는 건 사람에 따라 분노를 유발할 만하다.
(당시엔 연재 소설이었으니 독자들은 더 감질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근대소설 특징이긴 하지만 너무 설명적이라 독자가 스스로 감정을 느낄 만한 기회가 적다는 점은 아쉬웠다.
작중 표현을 빌리자면 정말 '센티멘탈'해질 만큼 비극적인 서사가 있음에도 그게 오롯이 와닿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도 이 책 정도면 나는 명작이라 부르고 싶다.
세계 범죄사는 193x년 3월 15일을 꿈에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실로 야수처럼 잔인하고 신기루처럼 신비롭고 악마의 도시처럼 호화로운 이 죄악의 실마리는 저 세계적 무용가 공작부인의 생일날 밤부터 시작되었다.
도입부터 가슴을 뛰게 만드는 근본 of 근본
"...(전략)
나는 지금 탐정소설 속의 인물이 아니고 한 명의 생생한 현실 속의 인물이다! 탐정은 모름지기 리얼리스트여야 한다. 로맨티스트여서는 아니 된다!"
때는 무더운 여름날, 서편 하늘에 기운 뜨거운 햇볕이 무섭게 내리쪼이는 오후 5시경......
유불란 탐정은 홀로 2층에 남아서 마치 재미있는 서부활극을 눈앞에 보듯 들창에 상반신을 의지하고 쫓고 쫓기는 자의 그 흥분된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풍선은 어느덧 조선은행 상공으로 옮아왔다. 풍선을 따라 역시 그편으로 밀려가는 사람들의 물결! 아우성 소리! 으와, 으와......!
다음으론 무슨 소설 읽을까? 고민중.
후보: 브라운 신부 시리즈, 명탐정의 창자, 엘리펀트 헤드, 다크, 한국사 이상현상 연구원, 리셀러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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