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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책

[리뷰/책] 홀(The Hole)

by 저당단 2026. 7. 13.

 

지은이 : 편혜영

 

그동안 단편집만 읽다가 처음으로 읽어본 편혜영의 장편 소설.

 

전반적으로 '어쩌면 스무 번' 같은 편혜영 작가 특유의 위화감과 불안을 조성하며, 잔잔한 공포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 없기에 답답하고 불편한 기분이 든다. 마치 해답 없는 수수께끼를 읽는 것 같았다.

 

주인공의 이름이 '오기' 이다.

이게 성씨가 오씨인건지 성을 제외한 이름이 오기인건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소설은 교통사고 직후 오기가 병원에서 눈을 뜨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사고로 오기의 아내는 죽고 오기는 사고 후유증으로 전신마비 신세에 처하는데,

오기의 보호자를 자처한 사람은 뜻밖에도 오기의 장모였다.

 

오기는 퇴원한 후에도 꼼짝없이 침대에 갇히게 되고,

장모의 주관 아래 찾아온 간병인과 간병인의 아들, 전 동료들이 어떤 불쾌하고 언짢은 말이나 행동을 하든지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사고 후 파편화된 기억을 모으면서 자신의 삶을 찬찬히 되돌아보는것뿐.

시간이 지나면서 오기는 그날의 사고에 대해서도 기억해내게 된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장모가 언제부터 사고의 진실을 알고 있었던 건지,

또 장모라는 사람을 그저 '딸을 사랑하는 어머니' 로만 정의내릴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아내가 느꼈던 것처럼 오기가 점차 깊어지는 고립과 배신감 속에서 절망적인 나날을 보냈다는 걸 생각하면 장모가 처음부터 진실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겠지만, 복수심 하나만으로 그 기간을 연극으로 꾸몄다면 장모의 행동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공포마저 느껴지며 장인의 죽음도 어쩌면 장모와 관련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까지 들게 한다.

 

무엇보다 막판에 하이라이트 장면이 나오는데 내가 책 읽으면서 이렇게 긴장되고 무서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물론 편혜영 작가의 문체는 항상 좋았지만 영상이 아닌 문장으로도 이렇게 쫄깃함을 줄 수 있다는 점이 굉장히 놀라웠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영화 <더 홀>이 개봉된다는데 소설의 맛을 잘 살릴 수 있을지 궁금하다.

<달콤한 인생>, <악마를 보았다>, <장화, 홍련> 등을 찍은 김지운 감독이 연출한다고 한다.

장모 역할은 염혜란 배우인데, 상상하던 장모의 이미지와는 다르지만 <마스크걸> 에서 보여준 광기를 생각하면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하다.

 

"목사님이 와주셨네. 자넬 위해 기도하러 오신 거야. 이분들이 어디에서 오신 줄 알면 자네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날 텐데."
장모의 호들갑스러운 말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대단한 농담을 들은 양 크게 웃었다.
"놀라서 일어나시면 안 되죠. 은혜 받아 일어나셔야지요."
그중 한 사람이 말했다. 키가 작고 시종일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환하게 웃는 남자였다. 장모는 그가 목사라고 했다.

 

발언도 유머러스하고 유쾌한 분위기인데도 불쾌하게 하는 치밀함.

 

"그게 얼마짜린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들어가서 저 병신한테 물어봅시다. 도대체 얼마짜린지."
"이렇게 천박하고 막돼먹었으니 평생 저런 병신이나 상대하지."
"아저씨, 미안합니다."
공손하게 허리를 구부렸다.
"제가 다 마셔서 죄송합니다."
또 허리를 숙였다.
"씨발, 맛있어서 그랬습니다."

 

생동감이 넘치는 대사들

 

의사의 말을 곱씹었다. '의지를 발휘'해야 한다는 말에 담긴 비관과 '조금 더'라는 말에 담긴 낙관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감각이 있었다면 간병인의 억센 손아귀에 잡힌 다리가 아팠을 것이다. 하지만 오기에게는 어떤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기는 꿈쩍하지 않았다. 흔들리는 느낌이 없었다. 오기의 몸은 거짓말과 변명과 오해를 굳건히 버텨내고 있었다. 몸은 괜찮았지만 기분은 나빴다. 오기는 이미 큰 사고를 겪었고, 그것으로 겪어야 할 고통이 모두 끝인 줄 알았는데, 그 일 이후에도 보통의 삶과 마찬가지로 거짓말과 오해와 변명이 계속된다니, 이상했다.

 

작품의 숨막히는 분위기를 구성하는 문장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