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은이 : 무경
지난번 <1939년 명성아파트>를 읽고 이 책도 읽고 싶다고 했었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읽어봤다.
내가 이 책을 알게 된 계기가 특이한데,
타 회사 분께서 우리 사무실에 와서는 DDP에서 하는 울트라백화점 전시회 티켓을 주신 것이다.
할 것도 없는 김에 우연찮게 가게 됐는데 거기 있던 계간 미스터리 & 나비클럽 전시에서 이 책을 봤다.
그저 표지 한 번 본 건데 제목이 독특해서 기억에 남았다. 정작 이 작가 책은 다른 것부터 읽어봤지만...
책 제목을 참 잘 지은 것 같은 게, 책 내용이 기대하던 내용 그대로였다.
이번 작품은 미스터리보다도 사회고발, 시대물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서양의 악마라는 소재를 한국 근현대사에 접목시킨 참으로 매력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악마가 독자와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액자식 구성을 취한다.
이야기는 총 네 개이며 시간순은 아니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보답으로 술을 사겠습니다. 원하는 만큼 마셔도 좋아요.
참 의심 많은 인간이로군요. 이야기를 들려주고 술까지 사는 게 대체 무슨 속셈 때문이냐고요?
내 무용담을 자랑하고 싶어서 이러는 것뿐입니다. 맨입으로 권하기는 곤란하니 술도 사겠다고 한 거고요.
치지미포, 꿩을 잡지 못하고
1951년 한국전쟁 시기.
'마 상병' 은 윤 소위, 박 상사와 함께 빨갱이 대장이 숨어 있다는 외딴 초막으로 항햔다.
악마는 이미 썩은 윤 소위의 영혼은 뒤로 하고, 고결한 박 상사의 영혼을 타락시키기 위해 고민한다.
짜임이 압도적으로 치밀하고 시대물과 미스터리로서의 서스펜스까지 모두 잡은 것 같았다.
악마가 어떤 존재인지를 이 편에서 모두 보여준 느낌.
그래서인지 나머지 이야기들은 이보다는 충격과 긴장이 덜하지만 전개가 각자 유별나서 읽는 재미가 떨어지진 않았다.
아기가 태어난 직후 찾아온 세 명의 손님이라니, 마치 성경 속 동방박사의 모습 같군요. 그 셋이 총을 든 군인이었고, 그곳이 전쟁터였다는 게 달랐지만요.
이거 참, 엉뚱한 소리를 해서 미안합니다. 지금이야 이런 식으로 감상에 젖은 채 당시를 회상할 수 있지만, 그때는 괜한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년들 봐라? 빨갱이 새끼에게 먹을 걸 줘?"
윤 소위가 카빈 소총을 치켜들었지만, 박 상사가 노려보자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박 상사가 아니었다면 소총 개머리판이 분명 노파나 며느리의 머리를 찍었을 겁니다. 윤 소위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으니까요.
당장에라도 이놈 영혼을 거둬갈까?
자신 있었습니다. 윤 소위 정도의 얄팍한 자라면 말 열 마디, 아니 다섯 마디로 타락시킬 수 있었지요. 운이 좋다면 한 마디로도 충분하고요.
무슨 소립니까? 그는 그날 이미 타락했습니다. 부하를 거짓 모함으로 팔아넘겼고, 약하고 곤란한 처지에 놓인 이들을 구하기는커녕 비참하게 이용하려 했습니다. 다른 인간을 생각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자기의 욕망에만 온전히 몸담은 순간, 얄팍한 영혼은 타락하고 인간이길 그만둔 겁니다.
이 장에는 마음에 드는 문장이 너무 많지만 최소한으로 꼽아 봤다.
폐문조거, 문을 열지 못하고
1992년 휴거 대소동 직후.
악마는 몰락한 사이비 종교 터에 경비원인 '마 형제' 로서 소수의 인원과 함께 남아 있다.
어느 날 터에 기자와 경찰이 난입하고, 밀실에서 홀로 기도한다던 교주는 시신으로 발견된다.
휴거 소동은 최근 회사 동료분이랑 대화하다가 왜인지 이야기를 꺼내셔서 알게 됐는데 책에서 봐서 반가웠다. (...)
사이비 종교라는 소재는 좋았지만, 후반부 전개가 급작스럽고 현실감이 떨어져서 조금 아쉬웠던 편.
인간의 믿음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사라지는 것 또한 순식간입니다. 유씨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총재의 장침에 꿰뚫린 순간 세상의 보편적 진실에 맞는 눈을 되찾았으니, 장침은 정말로 유씨를 치유한 거지요.
자신을 해친 사이비 종교를 스스로 처단해야 한다는 아집이 사명감으로 포장되었습니다.
이상한 말을 하는군요. 다른 이의 지시만으로 남을 죽이고 자기 목숨까지 끊는 게 말도 안 된다는 겁니까? 진심인가요?
하지만 말입니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아도 돼. 스스로 결정하지 않아도 돼.
어떻습니까? 달콤하게 들리지 않았나요?
부복장주, 뱃속에 숨기지 못하고
1987년 7월, 독재 철폐 직후.
'마 선생' 으로 불리는 악마는 꽤나 많은 재산을 축적했고, 그에 꼬이는 사기꾼 황씨가 있었다.
소유한 폐광에 일본군이 숨겨둔 금이 있다는 그의 말에 투자 가치를 판단하기 위해 그곳으로 향한다.
시대배경 소재를 가장 적게 사용한 회차이며, 판타지 요소도 가장 많다.
작가가 부산 사람이라 그런지 부산 사투리가 아주 찰지게 등장한다.
말을 끝낸 황씨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습니다. 30대 후반치고 혈색 나쁜 얼굴이었지만, 한 시간 넘게 열변을 토한 덕에 그럭저럭 볼 만해졌더군요.
"폐광 내부 도면과 거기서 일했던 일꾼이 남긴 기록이 있습니다! 투자자들이 모이면 그걸 보여드리고 상세하게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그걸 먼저 보여주어야 투자자가 모이지. 지지리도 일머리가 없는 자 같으니.
(중략)
"제 손목을 걸겠습니다. 제 외동아들도 걸겠습니다. 우리 애가 참 공부 잘하고 성실합니다. 명문대 갈 거라고 사람들 칭찬이 자자합니다. 그런 아들을 둔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니 한 번만, 부산에 있는 우리 집에 와 보십시오. 네?"
왜 주도권을 쥐어야 했냐고요? 당연히 영혼을 타락시키려는 목적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내 뜻대로 인간을 휘두를 수 있어야, 영혼을 쉽게 지옥으로 거두어갈 수 있단 말입니다. 물론 그러면서 인간이 추락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즐기려는 목적도 있지만요.
낭패불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1973년 유신 헌법 시기.
경찰로 근무하는 '마 경장', 그의 일터에서도 취조를 가장한 고문에 여념이 없다.
출세에 목말라 있던 신 경장은 취조를 자원하고, 민영수라는 용의자를 처음으로 맡게 된다.
1장과 비슷하게 시대고발물이며 악마의 입 터는 기술도 제대로 다시 볼 수 있다.
긴장감도, 낭패불감(진퇴양난)이라는 소재도 모두 좋았지만,
딱 2% ...전개가 너무 절묘한 '우연' 에 기대어 있어서 악마가 개입했다는 서술이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신 경장님이 조금 전부터 민영수를 '저 사람' 이라고 칭했습니다."
"뭐? 진짜야?"
(중략)
"너, 아까 '저 사람' 이라고 했잖아! 빨갱이가 사람이야? 사람이냐고!"
빨갱이는 짐승이고 자유대한의 적이다. 자유대한의 적을 감싸는 자는 똑같은 적이다. 나는 빨갱이가 보낸 간첩으로 의심받는 자를 옹호하는 말을 뱉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신 경장은 직감했을 겁니다. 자신이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을.
화장실도 이야기하기 좋은 장소로군요. 말소리가 울리는 것이며, 습한 공기며, 그날의 취조실이 떠오르는군요.
움직이지 마세요. 가만히 계십시오. 더 토해야 할지 모르잖습니까?
계속 몸을 비틀고 버둥거려도 소용없습니다. 이렇게 등을 슬쩍 누르는 것만으로도 당신이 지금처럼 고개를 못 들게 할 수 있어요. 이것도 그때 경찰서에서 배운 기술입니다.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인간을 꼼짝 못하게 제압하는 방법이지요.
악마가 쓰는 가명이 '마' 씨인게 재미있었다. 마귀 마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니까 좀 옛날에 나온 팀겟네임의 스릴러 웹툰이 있었는데,
거기서 절대악으로 취급되는 인물의 성씨도 마씨였던 게 기억난다.
마씨들 오열
악마인 나로서는 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당연했습니다. 왜냐고요?
당신 영혼이 내 것이니까요.
당신은 타락해야 마땅한 존재입니다. 자기가 바르게 산다고, 많은 것을 안다고 우쭐대지만, 정작 자신의 무능함을 직시하지 못하고 죄를 저지르는 더러운 존재입니다.
아니라고요? 당신은 죄에 물들지 않았다고요?
나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 안에 얼마나 엄청나고 무시무시한 것들이 도사리고 있는지를요.
악마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자를 사랑합니다.
악마와 대화하는 듯한 이런 서술 방식 덕택에 좀 더 몰입감 있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근데 화장실까진 들어오지 말아다오...
책 길이가 그리 긴 편이 아니기 때문에 금세 읽었는데 오히려 짧아서 아쉬웠던 것 같다.
내가 정말 오랜만에 이동 중이 아닌 여가 중에도 읽은 책이다.
읽으며 내 자신이 서서히 악마에 이입하고 있는지,
아니면 끝까지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이겨내기를 바랐는지 되짚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3장은 사기꾼들이 아니꼬워서 전자였고 .. 나머지는 후자였다.
요즘 책을 꽤 읽고 있는데,
지금은 이방인을 읽고 있다.
다음 책은 ... 사둔 한국 미스터리 소설 하나 있고, 그다음에 황금펜상 수상집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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